역사와함께하는여행

중국 삼국지 등애의 덩저우시 역사,날씨,관광지 추천

인사스톨러 2024. 2. 12.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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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좋아하는 강유의 라이벌로 나오는 인물로 등에라서 그런지 저자는 그렇게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고 소개를 안 시켜 줄 인물은 아니고 의외로 조조를 좋아하는 팬들 중에 등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삼국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촉을 멸망시키는 장본인 중 한 명인 등에, 그만큼 이 여행도 종착지가 다 되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1. 삼국지 이야기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으로, 는 사재(士載). 등충의 아버지며 형주 의양군 극양현 사람입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고향을 떠나 여남으로 이사하여 농부가 되어 송아지를 길렀다. 12살에 어머니를 따라 영천에 이르렀다. 이름을 등범(鄧範), 자를 사칙(士則)으로 지었지만 문중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등에(鄧艾)로 개명했다고 한다. 등애는 도위학사로 임명되었지만 말더듬이라서 간좌(문서를 다루는 각 부서의 보좌관)도 할 수 없어 도전수총초리(稻田守叢草吏)가 되었다. 벼슬도 출세직이 아닌 농업 계통의 낮은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후에 전농강기가 되고 인구 및 공물의 통계를 내어 중앙에 보고하는 자리인 주의 상계리까지 올라간다. 상계리 시절 사마의를 만났고 후에 전농공조가 되어, 사자로 사마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알려져 발탁된 것이다. 그렇게 그의 눈에 띄어 처음엔 태위 밑의 연으로 임명된 후 더 잘했던지, 중앙의 상서랑으로 임명받는다. 이렇게 문관으로서 중앙 관직을 시작한다. 중앙 관료로서 등애의 첫 공은 대운하였다. 강유의 1차북벌때 강유가 국산(麴山)에 성을 쌓고 구안(句安)과 이흠(李歆)에게 지키게 하자, 진태 서질과 등애 등을 인솔하여 성의 보급을 끊었고, 진태와 곽회가 구원하러 온 강유까지 격퇴하자 구안과 이흠은 결국 위군에 투항한다. 강유가 물러나자, 곽회는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서쪽으로 강인을 공격하려는데, 등에는 강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둔한다. 3일 후, 강유는 요화를 보내 등에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도성(洮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등에가 먼저 도성에 도착해 강유군을 막아냈다. 251년에는 조정에 글을 올려 남흉노의 세력을 둘로 나누어 그들의 힘을 약하게 할 것을 건의하자 사마사는 등에의 건의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오나라 대장군 손준 등은 10만 대군이라고 외치며 장강을 건너려는 형세를 나타냈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등애를 보내 비양을 차지하도록 하였지만, 등에는 적군과 멀리 떨어져 있는 요해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신속하게 부정으로 옮겨 주둔하였으며 태산태수 제갈서 등을 여장으로 파견해 막아 싸우도록 하여 적을 달아나게 했다. 강유의 4차 5차 북벌을 감행하고 강유가 이전에 촉에 항복한 하후패와 함께 옹주자사 왕경을 박살내고 왕경을 적도성으로 몰아넣고 포위했다. 등에는 이후 장수교위로 임명되었고 무늠을 격파했기에 방성향후로 봉해지고, 안서장군을 대행했다. 등에, 호분 등은 일단 물러난 뒤 반격을 하자고 했으나 진태는 조속히 공격하자고 했고 즉시 적도로 행군하여 촉군을 포위하려 하자 강유는 퇴각했다. 강유는 등에와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지만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 밤에 위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산길을 따라서 상규로 달려가 호제와 합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호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오지 않았고 등에는 단곡에서 교전하여 강유를 격파한다. 이때 등에 전에 따르면 등에는 천여급 참수에 촉장을 10명이나 죽였다고 하며 대장군이었던 강유는 스스로의 벼슬을 위장군으로 깎아버릴 정도였다. 강유의 6,7차북벌때 257년 등애는 사마망과 함께 장성으로 쳐들어온 강유에게 대응하지 않고 잘 방어해 강유군을 물린다. 262년에는 후화에서 강유를 또 패퇴시킨다. 강유는 퇴각하여 답 중을 지켰다. 촉을 정벌할 시기 263년, 해가 가도 끈질기게 계속되는 강유의 북침에 골머리를 썩 인사마소는종회의 진언에 따라 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종회는 장안 방면에서 양안(촉의 오른쪽에 해당) 방면으로 쳐들어가며 등에는 제갈서와 함께 옹주 방면에서 답 중으로 쳐들어가 강유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강유는 음평을 통과해 검각에서 결사농성을 벌였다. 이후 검각에서 종회와 강유 사이에 지루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등에는 이 상황에서 음평곡을 넘어서 검각을 우회해 사천 분지로 침투하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건다. 애당초 촉한이 음평을 지키고 있으면 이곳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답중과 음평도 먹은 상황에서 부성을 찔러 검각의 수비를 푸는 것을 전제로 움직인 것이다.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부대만 전멸할 뿐 종회의 본대는 타격이 없으니까, 죽음을 각오한 도박이었던 것이다.
이에 등에는7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음평으로 가서 정예병사를 선발하며 산길을 타 넘으며 검각을 우회하기로 한다. 제갈서에게도 같이 진격하자고 했는데, 제갈서는 산을 타기 싫었는지 그대로 종회에게 합류했지만 이후 종회의 무고로 군권을 빼앗기고 수도로 압송되었다. 이때 등에가 선택한 루트는 음평으로부터 작은 길을 달려 한덕 양으로부터 강유성과 좌담도로 들어가 면죽으로 가서 직접 성도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강유성을 정복한 등에는 다음으로 상대할 면죽관의 제갈첨에게 등충 사찬을 보내지만 그들은 전세가 불리해 퇴각하여 돌아온다. 등충과 사찬이 적을 공격할 수 없다고 했다가 등에가 이 싸움에 모든 것이 걸려있어 불가능한 것이 있겠냐고 화를 내면서 목을 베려고 했다. 이에 등충과 사찬이 급히 돌아가 다시 싸워 촉군은 격파해 제갈첨, 장준 등의 머리를 베고 면죽관까지 점령한다. 이후 성도에 도착, 유선의 항복을 받아내어 촉한을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등에는 촉의 안정을 위해 힘쓴다. 등에는 촉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을 조사하여 약탈한 일이 없고, 항복한 자를 받아들여 위로하고 옛 사업을 회복하도록 하였으므로, 촉나라 사람들은 등애를 칭찬했다. 또 후한 초기, 등우의 이전 일에 따라서 전권을 발휘하여 유선을 행표기장군으로, 태자를 봉거도위로, 제왕을 부마도위로 임명했다. 촉나라 신하들은 각자 지위의 고하에 따라 왕의 관직으로 임명되었고, 간혹 등애 수하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 사찬을 익주자사대리로 임명하고, 농서태수 견홍 등이 촉나라 안의 각 군을 대신 관리했다. 확실히 군정관으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등에는 자신의 날개를 꺾은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을 그토록 후원한 진공 사마소일 줄은 꿈에서도 미처 상상치 못했다.
큰 전공으로 한껏 고무된 등에는 연회 자리에서 촉의 사대부들을 모아 놓고, "그대들은 나 때문에 산 것이지 만약 오한이 쳐들어온 거라면 모두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가 식견 있는 자들에게 비웃음을 산다. 사마소에게 등애는 성격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절대 편한 인물이 아니었다. 본인 능력으로 농부에서 일국의 최고위 장군까지 올라간 입지전적 인물이다 보니 자부심이나 고집이 매우 남다른 사람이었다. 아랫사람에게 자비롭거나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고 아군을 무작정 희생해 가며 무모한 작전을 본인의 고집으로 성공해 내고, 촉병으로 경관을 쌓은 것과 사마소에게 보낸 답변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황제를 백주대낮에 참살해 불안 불안한 정통성에 관구검, 문흠, 제갈탄까지 지방 사령관들의 반란을 수차례 경험했고, 촉 정벌 장군들을 못 믿어 종회, 등에, 제갈서로 지휘권을 분산시킨 사마소가 그런 성격에 어마어마한 전공이 누적된 등에를 곱게 봤을 가능성은 뒷날의 등애 가족들에 대한 처분을 보건대, 그리고 사마소의 성품을 생각했을 때 없다. 하지만 등에는 사마소의 성정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결국 종회, 호열, 사찬 등이 등에에게 모반할 조짐이 있다고 보고하고 등에, 등충은 감군이던 위관에게 불시에 붙들려 수레에 갇혀 낙양으로 호송된다. 위 씨 춘추에 따르면 등에는 하늘을 우러러 "나 등에는 충신이거늘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백기의 잔혹한 운명이 오늘 또 재현되었구나."라고 탄식했다.
이후 종회가 모반을 일으키나 피살되고 결국 반역의 뜻을 가졌던 것은 종회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에 등에 진영의 장수와 병사들은 오해가 풀린 것이라 여겨 등에를 모시고 돌아오나 이 행동 때문에 등애를 종회에 같이 모함해 잡아다 가둔 위관이 등에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움을 품어 등에에게 원한이 있는 전속과 휘하 병력들 파견하여 등에, 등충을 면죽 서쪽에서 참수해 죽인다. 같이 가던 사찬은 등애 진영의 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병사들에게 원한을 산지라 수백 번이나 난도질당하면서 죽었다.

 

 

2. 덩저우시 역사

 

   덩저우시(중국어: 邓州市, 병음: Dèngzhōu Shì)는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난양시의 현급 행정구역이다. 넓이는 2294km 2이고, 인구는 2007년 기준으로 1,620,000명이다. 도시 면적은 35 km2이고 인구는 30만 명이다. 기원전 4000년 무렵의 양샤오 문화 유적이 발견되어 유구한 역사가 있음이 밝혀졌다. 하나라 시기 일대에 등나라가 세워져 상나라 주나라 시기에 제후국으로 있었고, 이로써 등주 지명이 유래되었다. 현 샹양시 북부에 있던 소국 우 (鄾)를 속국으로 두는 등 춘추시대 초엽까지 중소국으로 있던 등나라는 기원전 678년 초문왕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초나라 지배기에 양읍 (穰邑)이라 불리다가, 기원전 312년 한나라가 정복했으나 기원전 296년 진나라령이 되었다.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 남양 군(南陽郡) 양현 (穰縣)에 속했고, 남쪽 샹양 방향에는 등현 (鄧縣)이 있었다. 후한 말엽 남양은 장수의 근거지였다. 197년, 조조가 남하하자 장수는 귀순했다가 반기를 들어 그를 격퇴한 후 근거지를 남서쪽의 양현으로 옮겼다. 이후로도 유포의 도움으로 조조와 맞서던 장수는 관도대전 직전에 결국 귀순했다.
208년 적벽대전 당시 조조는 원활한 보급을 위해 양현에서 장강까지 이어지는 운하를 팠고, 조조군의 곡물 선박이 지나던 운하는 현재도 소조하 (小漕河)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북위 효문제 시기 등주가 설치되었고, 양현이 치소가 되었다. 다만 남양 일대는 남조와의 최전선이었기에 형주자사부는 북쪽 산맥 너머의 노산 (현 핑딩산시 루산현)에 있었다. 이때부터 남양 분지의 중심지는 완성에서 양성으로 이전되었다. 북위 말엽인 533년, 권신 고환이 황제파 군벌들을 제압하고 낙양으로 진군해 오자 겁에 질린 효무제는 형주자사 하발승과 접촉하여 등주 양현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산기시랑 류경의 설득으로 우문태가 있는 장안으로 행하였다. 이후 고환은 낙양과 등주를 점령하고 동위를 세우게 된다. 당나라 초엽인 624년, 돌궐 제국이 연이어 관중 지방을 침공하자 일부 대신들이 양양 혹은 등주 일대로의 천도를 건의하였고, 당고조 역시 동의했으나 진왕 이세민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이후 이세민은 직접 돌궐의 힐리가 한 과 맞서 관중을 안정시켰다.
당나라 말엽인 896년, 좌간의대부 겸 동평장사 주박이 상소를 올려 나라가 혼란하니 중원에 속하면서도 민심이 선하고 외침에서 안전한 양양 / 등주 일대로 천도할 것을 청하였다. 당소종 역시 그에 동의했으나, 권신 주온 (주전충)이 내켜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후략 시기인 909년, 등주에는 선화군절도 (宣化軍节度)가 설치되었고 현 난양 및 쑤이저우 일대를 통솔했다. 후당 시기인 923년, 선화군절도는 위승 군 절도 (威勝軍节度)로 개칭되었다가 후주 시기인 953년 무승군절도 (武勝軍节度)로 바뀌었다.
북송 시기인 1045년, 대학자 범중엄이 등주에 부임하였다. 그는 4년여간 등주자사를 지냈고, 1046년에 그 유명한 선우후락의 명언을 남겼다. 북송 후반부에는 한때 상군 (上郡) 혹은 망군 (望郡)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1126년, 금나라 군이 남하하자 재상백시중 이방산 등은 황명을 받들어 양양 및 등주로 피신하려 했으나 장군 이강의 반대로 저지되었다. 이후 남도도총관 장수가야가 송흠종에게 양양 및 등주를 거쳐 장안으로의 파천을 권했으나,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금군이 재침하여 정강의 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후 1127년, 응천부 (상추시)에 있던 송고종은 금군이 다가오자 피란지를 물색했다. 이에 상서우복시 겸 중서랑 이강 등은 피란지가 관중, 양양 & 등주, 건강 순으로 적합하다 상주하였다. 사대부 대부분 역시 수비에 용이하면서 중원과 가까운 남양으로의 파천에 동의했고, 이강은 등주성 보수까지 명령했으나 금군이 근접해 오자 고종은 황잠선 등의 의견에 따라 건강으로 피신했다.
정강의 변 이후로도 등주는 송나라 영토로 남았으나, 1141년 소흥화의 시에 양현의 남쪽과 서쪽 40리에 국경이 설정되며 금나라에 할양되었다. 금나라는 국경도시인 등주에 송과의 교역을 위한 시장인 각장 (榷場)을 두었다. 1161년, 채석기 전투  우윤문 남송 군대가 등주를 점령했지만 융흥북벌의 실패로 1164년 재차 금나라 령이 되었다. 금나라 시기에 양현은 남경로 (南京路) 산하 등주의 치소였고, 무승군절도 역시 유지되었다. 등주 산하에는 양현, 남양현, 내향의 3개 현이 있었고 양현 산하 4개 진 중에는 신야 (현 신예현)도 있었다.
몽골-금 전쟁의 막바지인 1232년, 몽골군이 개봉을 포위하자 원수 저널은 귀덕부 (상추시) 파천을 주장했고 승상 새부리 및 우사낭중 백화 등은 등주 파천을 제안했다. 양자를 택한 금애종은 귀덕부를 거쳐 채주에 당도, 뒤이어 등주로 향하려 했으나 몽골-송 연합군이 남북으로 압박해 오자 결국 채주에서 항전하다 멸망을 맞았다. 원나라 시기인 1269년에 등주에는 외성이 축소되었고, 1273년에 등주는 양양부 (襄陽府)에 소속되었다. 1279년에는 하남강북행중서성 (河南江北行中书省) 남양부 (南陽府)로 개편되었고, 이로써 천년 가까이 양현으로 유지되던 남양 분지의 중심지는 남양현 (완성)으로 옮겨졌다. 1351년 등주 출신의 왕권 (포왕삼)이 북쇄홍군을 일으켜 등주성 및 남양성을 점령, 초기 홍건 군 두령 중 하나가 되었다. 원 조정에서 파견한 진압군 사령관 실랄 파도는 등주성을 탈환한 후, 반군이 재차 활용할까 우려하여 성벽을 허물고 시가지에 방화하였다. 이로써 등주는 크게 쇠퇴했고, 한동안 폐허로 남았다. 그러던 1369년, 등주가 2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홍무제는 금오우위진무 공현을 파견해 지주로 삼았다. 공현은 현지 원로들의 안내로 옛 도시에 당도, 1371년에 내성 일대를 중심으로 복구한 후 1373년까지 벽돌 성벽을 쌓았다. [내성문] 성벽용 벽돌은 대형으로 제작되었고, 성문 홍예 쪽에는 녹인 철을 부어 강화하였으며 강물을 끌어와 해자도 두었다. 1499년, 지주 오대유가 기존 2.1km 둘레의 내성 주변에 7.5km 둘레의 토성을 축조하여 재차 외성을 세웠다. [외성문] 명나라 시기 일대는 하남포정사 (河南布政使司) 남양부에 속했고, 1369년 폐지되었던 양현은 1380년 복구되었다. 1381년에는 양현이 등주로 개편되었고, 신야 / 내향 / 석천 3개 현을 통솔했다. 청나라 시기에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옹정제 대에 등주는 사실상 해체되어 남양부에 직속 편입되었다. 신해혁명 후인 1913년, 등주는 등현이 되어 예남도 (豫南道)에 속했다. 예남도는 이듬해 여양도 (汝阳道)로 개칭되었고, 1927년에는 허난 성 직할에 놓였다. 1933년에는 허난 성 제6 행정독 찰구에 편성되었다. 중일전쟁기인 1939년 봄, 현 정부는 일본군의 군사적 활용을 방지하기 위해 외성과 내성을 허물었다. 국공내전 기인 1947년, 주민들은 성벽을 재건하고 물을 끌어와 해자를 채웠다. 다만 70년대 들어 문화 대혁명과 도시화 과정에서 성벽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내성의 서쪽 성벽만이 잔존한다.

 

 

3. 덩저우시 날씨

 

 

  허난성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고 후베이성,산시성의 경계와 인접해 있다. 기하학적으로 정저우, 시안, 우한의 삼각형의 중심에 놓여있고 세 도시와의 거리가 같다. 서북부는 높고 동남부는 낮으며 최고점의 고도는 469.7m, 최저점의 고도는 85m이다. 연평균 기온은 15 °C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730mm이다.

덩저우시는 대륙성 기후에 속합니다. 여름은 더운 편이며, 겨울은 추워서 영하 온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봄과 가을은 상대적으로 온화하며, 강수량은 연중 균일하게 분포됩니다. 그러나 덩저우시는 태풍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으므로, 태풍이 발생할 때에는 강한 바람과 강수량이 예상됩니다.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21.4
(70.5)
23.1
(73.6)
28.5
(83.3)
33.5
(92.3)
39.4
(102.9)
40.6
(105.1)
40.5
(104.9)
38.1
(100.6)
39.5
(103.1)
33.7
(92.7)
29.9
(85.8)
21.5
(70.7)
최고
기온
7.1
(44.8)
10.2
(50.4)
14.8
(58.6)
21.7
(71.1)
27.1
(80.8)
31.2
(88.2)
31.7
(89.1)
30.7
(87.3)
27.0
(80.6)
22.1
(71.8)
15.6
(60.1)
9.5
(49.1)
평균
최고기온
2.1
(35.8)
4.9
(40.8)
9.4
(48.9)
15.9
(60.6)
21.3
(70.3)
25.7
(78.3)
27.2
(81.0)
26.1
(79.0)
21.9
(71.4)
16.5
(61.7)
9.9
(49.8)
4.2
(39.6)
평균
기온
−1.6
(29.1)
0.8
(33.4)
4.9
(40.8)
10.9
(51.6)
16.2
(61.2)
21.0
(69.8)
23.7
(74.7)
22.7
(72.9)
18.1
(64.6)
12.4
(54.3)
5.7
(42.3)
0.2
(32.4)
평균
최저기온
−10.4
(13.3)
−9.6
(14.7)
−5.5
(22.1)
−0.3
(31.5)
6.2
(43.2)
12.7
(54.9)
17.1
(62.8)
14.1
(57.4)
9.5
(49.1)
0.6
(33.1)
−4.1
(24.6)
−13.5
(7.7)
최저
기온

 

 

 

4. 덩저우시 관광지 추천

 

 

   중국 덩저우시에는 다양한 관광지가 있습니다. 여행자들에게 추천할만한 몇 가지 관광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1. 퓨젠사(凤凰古城) - 퓨젠 사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성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통적인 중국 문화와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입니다.

 

2. 톈톈시(天坛) -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사원입니다. 아름다운 건축물과 넓은 공원을 둘러보며 중국의 역사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3. 둥관(董官居) - 덩저우시에서 가장 유명한 전통 중국 정원 중 하나입니다. 아름다운 연못, 정원, 건물 등이 조화롭게 조성되어 있어 중국의 전통 정원 문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4. 신승기(新胜记) 거리 - 덩저우시의 유명한 거리로, 다양한 상점과 음식점, 문화공연 등이 있는 곳입니다. 중국의 현지 문화를 체험하고 지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덩저우시에는 이 외에도 많은 관광지와 유명한 명소가 있습니다. 여행 일정과 관심사에 따라서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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