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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지 장소의 쉬저우시 역사,날씨,관광지 추천

인사스톨러 2024. 2. 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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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침략과 지략을 빼고 제일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면 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력과 군사를 사용하여 적을 무찌르고 그 사이사이 군사가 전략으로 요충지를 쉽게 탈환하면 그곳에 민심과 지역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내정입니다. 그리고 그 내정의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장소입니다. 그는 오래 살았으며 오나라의 내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1. 삼국지 이야기

 

 

    장소는 서주 팽성국 사람으로 자는 자포(子布)입니다장소는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고 예서(한자의 서체 중 하나)에 뛰어났습니다조욱왕랑과 친하게 지내며 명성이 있었습니다. 서주자사 도겸이 장소를 무재로 천거했지만 장소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이 일로 도겸은 장소를 잡아들였고 친하게 지냈던 조욱이 온 힘을 기울여 장소가 풀려나게 도와주었습니다. 황건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건너간 장소는 주유의 추천으로 회계태수 손책의 휘하에 들어가 벼슬을 하게 되었다.
손책은 장소를 매우 신임하였고 그에게 정사의 일체를 맡기는 등 모주로 대우했고 나중에는 그를 중부라 불렀다. 그러던 와중에 원술이 칭제하자 손책은 원술과 절교했는데 이 때 장소는 손책의 명으로 원술에게 보내는 절교 격문을 작성했다. 사실 장소는 이 당시의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간파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원술이 칭제를 하자 장소는 손책에게 원술이 대의명분과는 정반대로 가려는 행동을 저지시키기 위한 격문을 작성하게 했다. 다음은 그 격문의 내용이다. 손책은 사실상 받아쓰기만 했고 내용의 큰 틀은 장소가 만들어줬다. 손책이 임종 시에는 장소에게 손권을 잘 보살펴 달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손권의 능력이 못하다면 그가 직접 나라를 취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한 것과 같은데 그만큼 손책이 장소의 능력을 믿고 신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소는 손권을 모시면서도 특유의 신중함으로 국사가 경솔히 이루어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손권의 지배 기반을 든든히 하였다. 손권 역시 장소를 중히 여겨 그가 출정하거나 떠나는 일이 있으면 장소를 항상 후방에 남겨 그에게 정사 일체를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소의 일생이 제대로 꼬이는 사건이 터지는데 208년에 조조가 유표가 죽어 무주공산이 된 형주를 함락하고 강동 땅을 노리자 주화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에게 대항하는 것이 무익한 일임을 들어 항복을 주장했다. 손권은 이러한 주장에 굴복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때 노숙이 아무 말 없다가 손권을 따라가 넌지시 그들 모두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신임을 얻었고 노숙이 파양에서 불러들인 주유가 적극적으로 항전을 주장한 뒤 손유 연합이 기어이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조조군을 격파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항복을 주장하던 장소의 입지가 상당히 축소된건 물론이고, 더 극단적으로 평가하면 숙청만 피했을 뿐 장소의 정치 커리어는 사실상 끝나게 된다. 어쨌거나 적벽대전 승전 이후 주화파의 우두머리 격이였던 장소의 입지가 엄청나게 좁아지긴 했지만 아예 쫒겨나거나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활동했던 기록이 꾸준히 있으며, 적벽의 대승 직후 손권이 합비로 진군한 것에 맞추어 장소가 서주로 진군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일족들도 이궁지쟁 이전까지는 꾸준히 정계에서 활약을 했지만, 2인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손권도 장소가 이랬던 것을 내심 언짢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이 굉장히 의미심장한 게 장소의 나이가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과 동갑내기라는 점이다.
221년에 위나라에서 사자 형정을 보내어 손권을 오왕에 봉했을 때 형정이 궁궐 문에 들어서고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으므로, 장소는 형정의 무례함을 꾸짖고 협박하자 형정은 수레에서 곧 내렸다고 한다.
손권이 황제를 칭하게 되자 장소가 손권에게 축하하러 왔는데 손권은 장소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만약 장공의 계책같이 했다면, 지금쯤 이미 밥이나 빌어먹고 있을 것이오."라고 쏘아붙였고, 장소는 땀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권의 측근으로 남아 그를 보좌했는데, 사람됨이 강직하고 엄격했기 때문에 손권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또한 손권은 그를 꺼리기도 하였는데, 장소의 사람이 꼬장꼬장해서 군주인 손권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주로 말싸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영감님이 뭘 믿고 그러는지 몰라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모양.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손권이 칭제하자 장소는 늙었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사퇴하지만, 정작 촉의 사신이 오에 와서 촉을 찬양할 때 반박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자 손권은 반드시 사신에게 반박했을 장소를 그리워해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 공손연이 오의 번국이 되기를 청했을 때 손권은 장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신 장미와 허안을 요동에 보내 공손연을 연왕에 임명하게 했다. 화가 난 장소는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았고, 손권도 화가 나서 장소 집 문을 흙으로 막았다. 그런데 장소의 예측대로 공손연은 장미와 허안을 죽였다. 이후 손권이 장소에게 사과도 하고 구슬려보기도 했지만 영감이 단단히 삐쳤는지 묵묵부답으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결국 손권이 집에 불을 지르면 나오겠지 하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더니 그래도 끝까지 장소는 집을 나서지 않아서 결국은 아들이 장소를 업고 나왔다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나 손권과 대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숙청되거나 하야하지 않았는데, 이는 손권이 장소를 마냥 아껴서라기보다는 손오 체제의 불안정성 덕분에 숙청할 여건이 되지 못했는 데다가 본인 역시 고명대신 인 데다 체제 안정에 기여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손권 입장에서는 토호를 견제해야 할 카드도 필요했고 말이다.
하여간 이 때문에 장소의 말년 30여년간 두 사람은 정말 많이 티격태격했다. 손권은 장소에게 "오나라의 사대부들은 입궁하면 곧 나에게 절하지만, 출궁 하면 곧 그대에게 절한다. 내가 그대를 공경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건만 몇 번이나 백관 한가운데서 나를 꺾으려 든다."(吳國士人入宮則拜孤 出宮則拜君 孤之敬君 亦為至矣 而數於眾中折孤)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한 번 이미 군주의 뜻을 배신하고 적에게 항복하자고 권했고, 두 번이나 승상 임명에 퇴짜를 놨으니 권위가 죽을 법한데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부터 닦아놓은 명사의 간판이 워낙 번쩍번쩍해서 손권이 없는 궁 밖에서는 사족들의 영수, 리더 대접을 받고 옳은 말이긴 해도 어쨌든 사사건건 자신한테 맞서려고 든다는 점에서는 손권 입장에서 절대로 승상 같은 더 큰 실권을 줄 수 없고, 줘서도 안 되는 존재였을 법하다. 단지 명성과 여론을 함부로 어쩌긴 어려우니 선 넘을 만하면 적당히 달래면서 의전용, 내정용 트로피로 곁에 둔 것에 가깝다. 국가에는 여러모로 필요한 존재지만 손권 본인에게는 갈수록 정치적 부담이란 점은 말년의 육손과도 묘하게 포지션이 겹치는데, 그나마 육손과는 달리 군사적 영향력이 없고 + 정치적 실권도 약해서 부담의 레벨은 덜했을 것으로 보인다.

 

2. 쉬저우시의 역사

 

    중국 장쑤성 북서부에 위치한 지급시이다. 회사 이북에 위치하고, 면적 11,765㎢, 인구는 2018년 기준 880만 명 (이 중 시구 335만 명)으로 장쑤성 내에서는 쑤저우시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허난, 산둥, 안후이, 장쑤성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교통의 중심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삼국시대 국공내전 등 역사상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한편 쑤저우와 표기나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되는 일도 있다.
춘추전국시대, 초한쟁패기, 삼국시대, 남북조시대, 금나라 몽골 제국이 침공, 원명 교체기 등 전근대 시기 남중국과 북중국 세력 간에 수없이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운하와 황허, 화이허, 장강의 범람으로 많은 홍수와 기근을 겪었다. 그럼에도 수운 교통의 중심이었기에 꾸역꾸역 재건되었으며, 명대에는 운하의 선박들을 노리는 도적떼가 들끓었다. 20세기 들어서는 중일전쟁 시에 격전지였고, 국공내전 때에도 화이하가 전역이 벌어지는 등 현대사 시기에도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따라서 역사가 유구한 도시임에도 시내 지상에는 옛 흔적이 별로 없다. 다만 쉬저우 박물관에 가면 엄청난 규모의 한대의 유적을 볼 수 있다. 그 외에 화이하가 전역 기념관이 있으며, 운룡산 흥화사 등의 고적이 남아있다. 상고시대에는 상 시대엔 팽나라가 있었고 쉬저우 시대엔 서나라의 영역이었으며, 춘추시대에 들어와 서나라가 오나라에 복속되면서 중원의 세력권에 편입된다. 고대 9주에서는 쉬저우에 속했다. 전국시대에는 초한쟁패기 항우의 근거지로 익숙한 팽성(彭城)으로도 불렸다. 한편 유방의 출신지인 패현 풍읍 중양리(沛縣豐邑中陽里)도 시 북서부의 펑현 중심지에 있다. 현재 팽성과 중양리는 각각 쉬저우시 중심지(펑청 가도)와 펑현 중심지(중양리)에 각각 행정 지명으로 남아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삼국시대에는 자사 도겸 조조의 부친 조숭의 죽음을 막지 못하여 조조의 침공을 받았으나 유비의 도움으로 이를 격퇴하였다. 도겸의 사후 유비가 쉬저우 자사가 되었으나 휘하의 여포에게 빼앗겼고, 여포는 다시 조조에게 패하였다.
쉬저우를 정복한 조조는 하비에 치소로 두었으나, 위문제가 팽성으로 옮겼다. 5호 16국 시대 현지 주민들은 남쪽 회남 방면으로 피난하였고, 그중 팽성 출신의 유 씨가 두각을 드러내어 유송을 건국하기도 하였다. 408년 쉬저우를 수복한 송무제는 이를 북쉬저우와 쉬저우로 나누었고, 기존 팽성은 전자의 수도였다. 다만 10여 년 후 북쉬저우는 쉬저우로, 쉬저우는 남쉬저우로 개칭되었다. 이후 팽성현은 명대 초엽까지 계속 쉬저우의 중심으로 남았다. 당나라 들어 안정을 되찾은 쉬저우는 번영하였고, 639년의 2만에서 742년 20만으로 한 세기 만에 인구가 10배 증거 하였다. 781년에는 당에 반기를 든 평로 번 진의 고구려계 절도사 이납이 쉬저우를 공격하였고, 819년 당에게 토벌될 때까지 대운하가 불안정을 겪으며 일대는 침체를 겪었다. 8세기 말엽 쉬저우에는 무녕 (武寧) 절도사가 설치되었다. 다만 832년부터 병사들이 불복하기 시작하였고 849년, 859년, 862년에는 군란이 일어나 두 절도사가 축출되었다. 이후 부임한 왕식은 주동자를 처형하고 나머지를 해산하며 반란을 잠재웠는데, 해산된 이들이 도적떼가 되며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864년 사면을 내리며 재입대하는 자에 대해 일정 기간의 복무 후 북방의 더 나은 진영으로 배치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3천 명이 응하였지만, 계속 무녕에 머물자 서약을 어겼다고 여겨 868년 방훈의 주도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수천의 농민들 역시 반군에 가담하여 함께 팽성을 점령하였고, 수탈을 일삼던 장교들을 학살하였다. 다만 869년 반란은 진압되었고, 무녕은 위문의 의미인 감화 (感化)로 개칭되었다. 한편 그 무렵 황허가 인근 화이허 방면으로 진로를 옮기며 쉬저우는 자주 홍수에 시달렸고, 송대에 쉬저우는 별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1129년 쉬저우는 27일의 저항 끝에 금나라에 점령되었고, 항복을 거부한 자사 왕복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 조립이 남은 병력과 함께 저항하여 두 달 후 도시를 회복하였다. 다만 그 역시 전략적으로 후퇴하였고, 쉬저우는 금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1232년 몽골 제국에 의한 금의 멸망이 가시화되자 장군 왕우와 봉선이 반란을 일으켜 자사 툭 탄을 축출하였고, 한족 장수 안용이 이끄는 몽골군이 쉬저우를 점령하였다. 이에 남쪽 숙주 (宿州)의 장군 유안국과 비주 (하비)의 두정이 항복하였다. 다만 몽골인 장수 아수루가 그를 시기해 죽이려 하자 안용은 금나라로 전향하였다. 1233년 11월 몽골군이 재차 쉬저우를 점령했으나 얼마 후 떠나자 안용은 이번에는 남송의 편에서 쉬저우를 장악하였다. 이에 1234년 봄 장영이 이끄는 몽골군이 공격해 오자, 패전한 안용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1262년에는 몽골 측 쉬저우와 비주 총독이고가가 송에 투항하려다 실패하고 며칠 후 살해되었다. 원나라 말기인 1358년 8월 쉬저우는 홍건적에게 점령되었다. 원의 토곤 테무르는 항복 시 사면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듬해 봄 토크토아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1349년 가을 쉬저우는 점령되었고, 몽골군은 다수의 주민을 학살하였다. 쉬저우는 869년의 경우처럼 '무력으로 안정시키다'라는 의미인 무안 (武安)으로 개칭되었다. 1360년 한족 군벌 장사성이 쉬저우를 취하였으나 다시 1366년 주원장의 장군 서달이 점령하였다. 원의 코케 테무르는 재차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명나라의 장군 부우덕에게 격파되어 다수가 익사하였고, 살아남은 수백의 군마는 포로가 되었다. 10여 년의 혼란을 겪은 후 명대의 안정기에 쉬저우는 대운하의 수운을 바탕으로 번영하였고, 그 세관에 해당하는 초관 (鈔關)이 설치된 7개의 도시들 중 하나였다. 다만 남쪽의 쉬저우홍 (徐州洪)과 여량홍 (呂梁洪) 등의 도적떼가 선단을 약탈하였기에 조정에서는 쉬저우위, 쉬저우좌위, 비주위의 세 부대를 설치해 운하의 안전을 도모하였으나 도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17세기 들어 명조의 쇠퇴를 틈타 도적떼가 들끓자 조정에서는 기존 운하에 평행하는 계운하를 신설하여 위험을 분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기존 관개 시설이 교란되고 홍수가 잦아졌고, 특히 1624년의 대홍수 시에는 도심이 4m 아래의 물에 잠기기도 하였다. 명청 교체기에 쉬저우는 홍광제 정권이 청군의 장강 도하 저지를 위해 설치한 강북사진 (江北四鎮) 중 하나였다. 남명의 병부상서 사가법은 기존 도적떼 두목 고걸에게 수비를 맡겼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암살되었고, 후임인 이성동은 청군이 남하하자 도주해 버렸다. (1645년 여름) 따라서 청나라 장수 도도 (누르하치의 15남)가 무혈입성하였고, 얼마 후 사가법은 양저우에서 결사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청대에도 쉬저우는 대운하의 초관 도시로 번영하였다. 다만 1688년에 대지진이 벌어져 많은 이가 사망하고 시내의 주택 중 절반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1850년대에는 장강이 수로를 북쪽 산동 방면으로 트는 과정에서 연이은 홍수와 그로 인한 기근을 초래하였고, 쉬저우의 수로 대부분이 무력화되었다. 신해혁명 후에는 장쉰이 잔병과 함께 쉬저우로 도주하여 1911년 12월 5일에 입성하였다. 난징정부의 3차례 토벌 끝에 장쉰은 1912년 2월 북쪽으로 패주 하였다. 다만 1913년 계축전쟁 (2차 혁명) 당시 북진에 나선 혁명군은 패하였고, 7월 24일 북양정부가 쉬저우를 점령하였다. 그 후 장쉰이 돌아와 재차 거점으로 삼았고, 1917년 6월 베이징으로 진격해 장훈복벽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축출되었다. 남겨진 쉬저우 수비대는 폭동을 일으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후 쉬저우는 직예 군벌의 수중에 남아있다가 1924년 가을 2차 직봉전쟁 당시 3만 병력과 진군한 장쭝창에게 점령되었다. 이에 반격에 나선 쑨촨팡은 1925년 11월 8일 쉬저우를 자악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의 2차 북벌 시인 1927년 6월 17일 장제스가 입성하였다. 하지만 쑨촨팡과 장쭝창이 연합하여 반격, 6월 24일 쉬저우를 점령하였다. 이는 강남 여론의 분노로 이어졌고, 장제스의 첫 사임으로 이어졌다. 반격에 나선 국민당군은 12월 16일 쉬저우를 수복하였고, 이듬해 북벌을 완수하였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60만의 중국군과 24만의 일본군 사이에 쉬저우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에 각각 10만, 3만의 전사자가 발생한 후 1938년 5월 19일 장제스는 쉬저우 포기를 지시하였다. 다만 일본군의 포위 섬멸 작전은 실패하였고, 살아남은 중국군은 우한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난징에서 만큼은 아니었지만 일본군은 쉬저우에서도 학살을 자행하였다. 1945년 종전 후 9월 6일 국민당 군이 진주하였고, 쉬저우수성공서 (徐州綏靖公署)가 설치되었다. 한편 군법 재판으로 25명의 일본군이 처형되었다. 국공내전 기인 1948년 6월 6일에는 국민당 측의 초비총사령부(剿匪總司令部)가 설립되었다. 이어진 화이하이전역 (淮海戰役)은 국공내전의 3대 전장 중 하나였고,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1948년 12월 1일 인민해방군이 쉬저우에 입성하였고, 그 여파로 국민당은 장강 이북에서 공산당을 저지할 모든 여력을 상실하고 국부천대에 나선다.

 

3. 쉬저우시 날씨

 

 

 

   중국 쉬저우시의 기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쉬저우시는 아열대 기후에 속하며, 여름은 긴 기간 동안 무더운 날씨가 지속되고 겨울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편입니다. 쉬저우시의 여름은 기온이 30도 이상으로 오르는 경우가 많으며 습도도 높을 수 있습니다. 겨울에는 기온이 10도 이상으로 내려가지 않는 편이며 대체로 건조한 날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봄과 가을은 온화하고 쾌적한 날씨로,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광범위한 지역이기 때문에 지역별로 기후가 다를 수 있으므로, 여행을 계획하실 때는 구체적인 날씨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연평균 강수량은 850mm, 연평균 기온은 14℃이다.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19.8
(67.6)
25.9
(78.6)
30.1
(86.2)
34.8
(94.6)
38.2
(100.8)
40.6
(105.1)
43.4
(110.1)
38.2
(100.8)
36.2
(97.2)
34.5
(94.1)
29.0
(84.2)
21.3
(70.3)
최고
기온
5.6
(42.1)
9.1
(48.4)
14.8
(58.6)
21.4
(70.5)
26.7
(80.1)
30.7
(87.3)
31.8
(89.2)
30.8
(87.4)
27.2
(81.0)
21.9
(71.4)
14.4
(57.9)
7.7
(45.9)
평균
최고기온
1.0
(33.8)
4.1
(39.4)
9.5
(49.1)
16.0
(60.8)
21.5
(70.7)
25.8
(78.4)
27.7
(81.9)
26.8
(80.2)
22.5
(72.5)
16.5
(61.7)
9.2
(48.6)
2.9
(37.2)
평균
기온
−2.6
(27.3)
0.1
(32.2)
4.8
(40.6)
10.8
(51.4)
16.4
(61.5)
21.2
(70.2)
24.3
(75.7)
23.5
(74.3)
18.5
(65.3)
12.0
(53.6)
5.0
(41.0)
−0.8
(30.6)
평균
최저기온
−17.3
(0.9)
−23.3
(−9.9)
−7.6
(18.3)
−1.4
(29.5)
4.8
(40.6)
12.4
(54.3)
15.9
(60.6)
13.4
(56.1)
5.0
(41.0)
−1.0
(30.2)
−8.3
(17.1)
−13.5
(7.7)
최저
기온

 

 

4. 쉬저우시 관광지 추천

 

 

 

   중국 쉬저우시에서 추천하는 관광지 몇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1. 황샤계곡(Huangshan Mountains): 황샤산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치가 아름답고 독특한 암벽과 구름바다, 히말라야 레드 핀이라 불리는 독특한 소나무 등이 특징입니다. 등산, 산책, 자연 사진 촬영 등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습니다.

 

2. 황산(黄山) : 황산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산 중 하나로, 아름다운 경치와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합니다. 황산에는 많은 경치명소가 있으며, 대표적으로 구름다리, 세심한 정원, 동방 보석 등이 있습니다.

 

3. 허산(西递、宏村) : 허산은 전통 중국 민가 건축물이 잘 보존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정원과 전통적인 거리를 산책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4. 톈무산(天坛公园) : 톈파산은 중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톈바를 비롯한 건축물과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조경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관광지는 쉬저우시에서 인기가 많은 장소들입니다. 관광지 선택은 개인의 취향과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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