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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지 사마의의 자오쭤시 역사,날씨,관광지 추천

인사스톨러 2024. 1. 3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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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이긴 자가 승자라는 말이 있다면 사마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이나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그저 악역이며 제갈량의 라이벌정도이고 조조가 만들어놓은 위나라를 꿀꺽 먹은 배신자 등 좋은 이미지가 없습니다. 글쓴이도 어린 시절에 제갈량 라이벌인 것조차 얄미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편 삼국지는 사마의로 끝이 났습니다.

 

1. 삼국지 이야기

 

    사마의 179년 9월 17일 출생이며 후한 하내군 온현 효경리(현 허난성 자오쭤시 원현 샤오징진)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내군 온현 효경리에서 아버지 사마방과 어머니 기정(奇庭)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漢)대 명문가들은 대개 낙양과 가까운 거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여남 원 씨나 홍농 양 씨에는 조금 밀리지만 당대에 이미 손꼽히는 대호족 명문가였다.
할아버지 사마준은 학식이 넓고 고대의 유풍을 좋아했으며 신장이 8척 3촌이나 되었고, 풍격이 비범해 향리와 일족들이 그에게 의존하는 지역 호족의 리더 노릇을 했으며 영천태수를 지냈다.
아버지 사마방은 정직하고 공정한 관리로 정평이 났었는데 한서의 명신 열전을 그 자리에서 줄줄 암송했으며 본인 스스로와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얼마나 엄격했는지 아들들이 모두 나아가라는 명이 없으면 감히 나아가지 못했고, 앉으라는 명이 없으면 앉지 못했으며, 가리켜 질문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았고, 부자 사이는 숙연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엄격함 덕분이었는지 아들 8명이 모두 기재였고, 그 가운데 사마의가 으뜸이었다. 사마방의 벼슬에서 알 수 있는 듯이 그는 문관(경조윤)과 무관(기도 위)을 모두 거쳤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사마방의 다양한 경험은 자식들의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서 사마의의 특출 났던 정치적, 군사적 재능은 우연히 얻어진 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서로 간의 문답을 통하여 깨우친 것으로 생각된다. 사마의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절조를 갖추고 총명하며 많은 원대한 지략을 지녔고, 학문에 박학다식하고 유교를 가슴에 간직한 청년이 되었다. 한나라 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항상 개탄하여 천하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세설신어에 인용된 손성의 역사서 진양추에서는 "선왕(사마의)은 타고난 자태가 뛰어나고 고매했으며 영웅의 지략이 있었다"(宣王天姿傑邁,有英雄之略)라고 사마의를 당대의 준걸로서 묘사하고 있다. 조조의 제의를 사마의는 몇 차례 거절하고, 나중에 조홍이 그에 대해 알게 되어 접근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조조가 강경하게 나오자 그제야 관직에 임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의는 작게는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했으며 크게는 큰 모략이 있었다. 위에서 최염이 사마랑에게 한 말을 조조가 듣고는 그를 벽소하 고자 했는데 사마의는 풍비가 있다고 핑계를 댔다. 조조는 노하여 (그를) 거두고자 하였고, 사마의는 두려워하다가 문학연 직책을 받아들였다고 나온다. 늦게서야 조정에 출사한 인물 치고는 황문시랑, 의랑, 승상 동조 속, 주부 등 잘 나가는 관직을 역임하며 꽤나 출세했다. 조조가 사마의를 꺼렸기 때문에 명문가 자제 신분에 가축 돌보는 일까지 해야 했던 기록 자체는 진서 선제기 후반부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마의의 관직 생활이 지장을 받았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 진서 선제기의 해당 기록에도 스스로 가축을 돌보기까지 하는 사마의의 태도를 보고 조조가 의심을 풀었다고 적고 있고, 조비와 별 차이 안나는 사마의의 연령대와 늦은 출사시기를 고려하면 무난한 속도로 승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조가 낙양에서 죽자 조비가 놀라고 두려워했는데, 사마의가 장례 치르는 일을 다스리자 안팎이 숙연해졌다. 그리하여 임금의 관을 받들고 업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황제로 즉위한 당시 조비의 측근인 사마의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한나라의 자사와 태수는 상하관계가 명확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지방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해서 지방 군만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할 때, 중앙정부에서 독군어사(督軍御史)를 파견했다. 위나라에 들어서면 한나라 시절 장군직을 남발하지 않고 독군(督軍) 권한을 가진 중앙관료들로 위기상황을 극복하던 시절은 끝났고, 일반적으로 장군직을 가진 무관들이 행도독독군(行都督督軍)을 겸하는 기묘한 형태로 발전 혹은 변화하게 된다.

조예가 즉위하자 무양후(舞陽侯)로 고쳐 봉해졌다. 손권이 강하를 포위하고 그의 장수인 제갈근, 장패(張覇)를 보내 아울러 양양을 공격하자 사마의가 제군을 지휘해 손권을 쳐서 패주 시켰다. 진격해 제갈근을 격파하고 장패를 참수하고 아울러 천여 급을 참수했다. 무군대장군에서 표기대장군으로 승진했다. 227년 6월, 천자가 조령을 내려 사마의를 완에 주둔케 하고 독형예이주제군사의 직을 더했다. 230년,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대도독, 가황월이 더해지고 조진과 함께 촉을 정벌했다. 사마의는 서성에서부터 산의 나무를 베어내 길을 열고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해 한수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큰 비를 만나 회군했다. 진서 선제 기는 사마의가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朐䏰)에 도착하고 신풍현(新豐縣)을 함락했다. 군(軍)이 단구(丹口)에 주둔하다 비를 만나 회군했다.'라고 쓰고 있는데 문제는 저 구인이라는 곳이 한중이 아니라 파동군 구인현이고 신풍현은 경조의 신풍현밖에 없다. 지명이 틀린 게 커서 그냥 차라리 자치통감 말대로 서성에서 거슬러 올라갔다고 쓴 거 만도 못하게 되었다. 제갈량이 보낸 사자로부터 공명이 식사는 적게 하면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도맡아 한다는 말을 듣고 식소사번이니 제갈량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견했다.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관용구는 정사에서도 나오는 대목이지만 연의에서는 이 일화가 각색되었다. 제갈량이 죽자 사마의는 진격하는데 제갈량이 죽기 직전 명령으로 만들어진 목상을 보고 그가 살아있다 착각하여 깜짝 놀라 퇴각을 명령했다. 이후 사마의의 대사 "내 머리가 아직 붙어 있느냐?"가 압권이다. 이후 진짜로 제갈량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마의는 탄식하며 "그가 살아있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정사에서 이는 제갈량이 죽자 후미를 맡은 강유가 대처를 잘해서 사마의가 물러나자 생긴 속어이다.
사마의는 공손연의 난을 평정하는데 여기서 명대사를 읊는다. "싸울 수 있을 때는 싸우고, 싸울 수 없을 때는 지키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달아나고, 달아날 수 없을 때는 항복하고, 항복할 수 없으면 죽어야 한다." 정사에서도 나오는 명대사지만 정사와 비교해 보면 미묘하게 변경되었다.
조예가 죽은 뒤, 조상의 음모로 인하여 실권을 빼앗기지만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서 다시 정권을 탈환한다. 왕릉의 난의 묘사는 없으나, 죽을 때의 장면은 있다. 사마사와 사마소에게 나라에 충성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2. 자오쭤시 역사

 

 

    한대에 신샹 일대와 함께 사례교위 관할 삼하 (하동/하남/하내) 중 하나인 하내군에 속하였다. 현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7km 떨어진 우즈(무척: 武陟)현이 그 중심인 회현이었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산도가 이곳 출신이다.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25km 떨어진 원현은 춘추전국시대 초엽의 소국이던 온나라 (溫)가 있던 온현이었다. 하내는 문벌 가문인 사마씨의 본거지였고, 원현과 도심 사이의 친허 (심하 沁河) 북안의 샤오징전 (효경진)은 사마의의 고향이다. 도심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칭양시 (당시 야왕현) 북위 시기에 하내군 대신 설치된 회주의 중심이었다. 수나라 시기에 야왕현은 하내현으로 개칭되었다.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40km 떨어진 펑저우 (맹주)는 당송팔대가의 한 명인 한유의 고향이다.
송나라 시기에 들어 일대는 도자기 산업으로 유명했으며, 초작이라는 지명 역시 도자기를 구워 제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인근 타이항산 일대에는 석탄이 풍부하였고,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산업화와 함께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1898년 영국과 이탈리아가 채굴권을 얻었고, 20세기 초엽 신샹과의 철도가 놓여 우한이나 베이징으로 석탄을 운송하였다. 

1945년 9월 8일, 자오쭤 시가 설립되었고 1948년 3월에 자오쭤 현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10월 15일에 핑위안 성에 편입되었으나 1952년 11월 15일, 핑위안 성이 폐지됨에 따라 허난성으로 복귀하였다. 1956년 7월 9일, 자오쭤 시로 개칭되었다. 중화민국기에는 중국과 영국의 합작사인 중푸 (中福)가 채굴을 담당하였고, 20세기 초중반 중국 제2의 재벌이었다. 본래 동쪽 슈우현에 속한 진이었던 자오쭤는 중화인민공화국 들어 산업의 근대화와 기계화와 함께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1953년 마오쩌둥은 현지 노동자들의 노고를 치하하였고, 1956년 지급 시로 승격되었다. 2004년 운타이산이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3. 자오쭤시 날씨

 

   

   황하의 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남쪽으로 성도 정저우, 동쪽으로 신샹, 서쪽으로 지위안, 남서쪽으로 뤄양, 북쪽으로 산시성과 접한다.

온대 대륙성 계절풍 기후로 사계절이 분명하다. 연평균 기온은 16.1 °C이고 강수량은 558.7mm, 무상일 수는 231일, 연 일조량은 2009.6시간이다. 보통 자오쭤시는 대체로 온난한 여름과 춥고 건조한 겨울이 특징입니다. 봄과 가을은 상대적으로 온화하며 쾌적한 기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20.0
(68.0)
25.4
(77.7)
31.7
(89.1)
37.0
(98.6)
40.8
(105.4)
43.5
(110.3)
40.4
(104.7)
39.0
(102.2)
38.6
(101.5)
35.9
(96.6)
27.5
(81.5)
24.6
(76.3)
최고
기온기록
6.1
(43.0)
10.3
(50.5)
16.2
(61.2)
22.9
(73.2)
28.4
(83.1)
32.9
(91.2)
32.9
(91.2)
31.4
(88.5)
27.6
(81.7)
22.1
(71.8)
14.5
(58.1)
8.2
(46.8)
평균최고
기온기록
1.6
(34.9)
5.2
(41.4)
10.9
(51.6)
17.3
(63.1)
22.9
(73.2)
27.3
(81.1)
28.3
(82.9)
27.0
(80.6)
22.7
(72.9)
16.9
(62.4)
9.6
(49.3)
3.6
(38.5)
평균
기온
−2.2
(28.0)
1.0
(33.8)
6.1
(43.0)
12.1
(53.8)
17.6
(63.7)
22.1
(71.8)
24.4
(75.9)
23.3
(73.9)
18.4
(65.1)
12.3
(54.1)
5.3
(41.5)
−0.2
(31.6)
평균
최저기온
−12.9
(8.8)
−17.8
(0.0)
−5.1
(22.8)
0.3
(32.5)
8.2
(46.8)
13.4
(56.1)
17.4
(63.3)
13.9
(57.0)
8.5
(47.3)
−0.8
(30.6)
−6.7
(19.9)
−10.8
(12.6)
최저
기온

 

 

4. 자오쭤시 관광지 추천

 

   

   중국 자오쭤시(Jiaozuo)는 많은 관광지가 있어 다양한 경험을 즐길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추천 관광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손산(Shaolin) 사원: 중국 무술의 유명한 원천인 손산 사원은 자오쭤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입니다. 손산 사원은 사원 건물과 유적뿐만 아니라 손산무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합니다.

 

2. 조계산(Chaya Mountain) 자연보호구역: 조계산은 아름다운 산악 경관과 다양한 동식물 종류로 유명합니다. 산책로를 따라 산을 탐험하거나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정상으로 올라가 멋진 전망을 즐길 수 있습니다.

 

3. 효산(Huoshan) 산: 자오쭤시 근처에 위치한 효산은 중국의 가장 아름다운 산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효산은 특이한 돌관을 가진 독특한 지형으로 유명하며,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4. 원리(Chaya) 동굴: 원리 동굴은 중국에서 가장 큰 석회암 동굴 중 하나입니다. 내부에는 아름다운 석순과 석화 등이 있어 동굴 탐험을 즐길 수 있습니다.

 

5. 관광 동계 마을: 자오쭤시 주변에는 전통적인 중국 마을도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중국 전통 건축물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으며, 현지 음식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자오쭤시에는 다양한 관광지와 활동이 있으니, 여행 일정과 관심사에 맞게 선택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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